요동백시(遼東白豕) - 고전속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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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사람의 흰 돼지새끼. 중국 한(漢)나라 때,요동(遼東) 지방의 어떤 농촌(農村)에서 사람들이 돼지를 기르며 살아 가고 있었는데,그 곳의 돼지는 모두 검은색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 한 집에서 검은 어미 돼지가 머리가 하얀 새끼를 낳았다. 이 집안 사람들은 매우 흥분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처음 보는 흰 돼지인지라,틀림없이 진귀(珍貴)한 동물로서 아주 상서(祥瑞)로운 징조라고 생각하였다. 이 소식(消息)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큰 구경거리라고 생각하여 우루루 다 모여들어 야단이 났다. 주인에게 축하(祝賀) 인사를 하는 등 잔칫집 분위기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진지하게 의논한 결과 “이 돼지는 보통 돼지가 아니고 상서로운 돼지니,그냥 우리 백성들이 소유하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니 존귀하신 황제(皇帝)님에게 진상(進上)하여야 한다”라고 결론(結論)을 내렸고,그 돼지 주인도 흔연(欣然)히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하였다.
그래서 그 주인은 며칠 뒤 직접 돼지 새끼를 지고 서울인 장안(長安)을 향해 길을 떠났다. 요동에서 장안까지는 5천리나 되는 머나먼 거리였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황제에게 칭찬을 듣고 상을 받을 것을 상상하며,힘든 줄도 모르고 길을 갔다.
며칠을 걸어가서 어떤 마을에 당도해 보니,돼지 가운데 흰 것이 몇 마리 보였다. 이 요동 사람은 생각하기를,“이 동네 사람들은 흰 돼지가 보배인 줄을 모르는가 보다. 흰 돼지가 보배라고 이야기하면 이 사람들도 황제님께 바치러 갈 것이니,나 혼자 빨리 가서 바쳐서 칭찬을 받고 상을 타야지”라며 걸음을 재촉했다. 며칠 더 가서 하동(河東) 지방에 이르고 보니,그 곳에 있는 돼지는 모두가 다 흰 것이었다. 그래서 요동 지방의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동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하동 지방 사람들의 대답인즉,“돼지는 검은 것도 있고, 흰 것도 있는데,우리 고을에서 키우는 것은 대부분 흰 것이랍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 요동 사람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돼지는 검은 것만 있는 줄 알고,흰 돼지를 무슨 진귀한 보물이라고 황제에게 바치러 온 자신이 얼마나 견문(見聞)이 좁고,세상 물정을 모르는 상태인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자기 동네 사람들도 견문이 좁고 세상 물정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동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 만이라도 세상에 흰 돼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자기가 이렇게 헛고생을 하지는 않았을텐데라고 생각하니,은근히 부아가 났다. 그래서 사람은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실(切實)히 느꼈다.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서울로 가던 발길을 다시 고향 요동으로 돌렸다. 먼 길을 왔다갔다 하느라고 많은 고생을 했지만,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실망(失望)과 수치심(羞恥心)에 가득 차서 돌아올 때는 길도 더 멀게 느껴졌다.
그대로 흰 돼지를 지고 고향 마을로 돌아온 사람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모여들어,“어찌 된 영문이냐”고 다투어 물었다. 그 돼지 주인은 마을 사람들에게,“우리 마을 사람들의 견문이 너무 좁습니다. 세상에 흰 돼지가 있는 줄을 몰랐으니까요. 앞으로 좀더 많은 것을 배우고 보고 듣고 그리고 다른 지방으로 여행도 해 봐야겠습니다”라고 자못 교훈조(敎訓條)로 일장 연설을 하였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이고,자기가 전공(專攻)하는 분야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남의 의견은 듣지 않고 자기 주장만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이 있는데,이런 사람은, 요동 사람들이 흰 돼지를 무슨 진귀한 것인양 야단을 떠는 것과 같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우주는 넓디넓어서 알아야 할 것은 너무나 많다. 아무리 박학다식(博學多識)하다 해도,한 개인이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좀 아는 것으로 자기의 학식을 뽐내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군림(君臨)하려 하고,교만(驕慢)을 떤다면,이는 진정한 배우는 사람의 태도라 할 수가 없다. 학식을 자기 과시(誇示)에 이용하는 도구로 삼을 뿐인 것이다.
(*. 遼 : 멀, 료. *. 東 : 동녘, 동. *. 豕 : 돼지, 시)
- 경남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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