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천금(一字千金) - 고전속지혜

- 홈지기 (114.♡.11.73)
- 08-19
- 404 회
- 0 건
한 글자라도 고치면 천금을 주겠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진(秦)나라의 정승을 지낸 여불위(呂不韋)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시황(秦始皇)의 실제적인 아버지인데,본래는 위(衛)나라의 상인(商人)에 불과하였다.
한번은 장사차 조(趙)나라의 서울 한단(邯鄲)에 갔다가 진나라의 공자(公子)로 조나라에 와서 볼모생활을 하는 자초(子楚)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진나라의 현재 왕인 효문왕(孝文王)이 아들이 없는 사실을 알고는,자기가 정치적으로 권력을 쥘 좋은 기회로 생각하여 자초를 잘 이용할 도모를 하게 되었다.
여불위에게는 조희(趙姬)라는 총애하는 젊은 시첩(侍妾)이 있었다. 그런데 남의 나라에 와서 볼모생활을 하는 자초가 조희를 보자 그만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래서 혼자서 속을 태우다가 안 될 줄로 생각하면서도 사모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여불위에게,“조희를 나에게 양보해 줄 수 없겠소?”라고 사정하여 보았다. 여불위는 화를 버럭 내며,“외롭게 지내는 처지라고 좀 잘 대해 주었더니,못하는 말이 없군. 남의 애인을 달라는 사람이 어디 있소?”하면서 거절(拒絶)하였다. 자초는 무안을 당했지만,어쩔 수가 없었다.
얼마 뒤 여불위가 자초를 찾아와 조희를 양보해 주겠다고 했다. 자초는 이루지 못할 줄 알았던 사랑이 이루어지니 너무나도 기뻐서 조희를 끔찍이 사랑하였다. 애첩을 넘긴 여불위는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조희는 이 때 이미 임신한 상태였는데,그 아이가 바로 나중의 진시황이다.
여불위는 여러 차례 진귀(珍貴)한 물건을 준비하여 자초로 하여금 진나라 왕과 왕비에게 선물하도록 했다. 이렇게 진나라 왕의 환심(歡心)을 얻어 자초가 마침내 다음 대의 진나라 왕이 되니,바로 장양왕(莊襄王)이다. 그러나 장양왕은 재위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조희가 낳은 아들 영정이 즉위하니 곧 진시황(秦始皇)이고,나이 13세에 불과했다. 여불위는 중부(仲父)라는 존칭을 받으며 섭정(攝政)을 하니,진나라의 권세가 모두 그의 손 안에 있었다.
그는 많은 선비들을 길렀는데,그의 집에는 3천명의 선비가 모여들었다. 그들 가운데는 각 분야의 학문에 정통(精通)한 인사가 많았다. 여불위는 이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자기가 아는 바나 들은 바 및 각종 견해를 글로 적어 내도록 했다. 여러 선비들이 적어 낸 글을 모아 토론을 거쳐 책으로 편찬한 것이 `여씨춘추(呂氏春秋)`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운데서 대표적인 책이다.
책이 다 완성되자,여불위는 그 책과 황금 1천근을 진나라 서울인 함양(咸陽)의 성문 위에 매달고 다음과 같이 포고(布告)하였다. “누구든지 이 책 내용 가운데에서 한 글자를 더하거나 한 글자를 깎는 사람이 있으면,그에게 황금 1천근을 상으로 주겠노라”. 여불위의 권세 때문에 누구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여불위가 자기의 명망(名望)을 높이고자 한 정치적 수작이지만,그러나 자기가 주관하여 편찬한 책에 대한 강한 자부심(自負心)이 들어 있는 처사였다.
오늘날 인쇄기술(印刷技術)의 발달로 매일 신간(新刊)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책을 만들기 어려웠던 시절에 나온 책들보다 오류(誤謬)가 더 많으니,어찌된 일인가? 각 출판사마다 책을 빨리,많이 만들어야겠다는 경쟁심만 앞서고,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
(*. 字 : 글자, 자. *. 金 : 쇠, 금. 황금, 금)
- 경남신문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